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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사랑의 감각, 파괴와 열망, 식인과 사랑

by 오롯한 세상 2025. 4. 25.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는 감각의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손끝으로 만져질 듯한 여름 햇살, 수면 위를 스치는 바람, 한낮의 과일 향, 그리고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눈빛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 관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며, 영상 그 자체를 감정의 언어로 변환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 ‘서스페리아(Suspiria)’, ‘본즈 앤 올(Bones and All)’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구축해 온 그의 영화 세계는 언제나 감정의 파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Luca Guadagnino

 

사랑의 감각: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대표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은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이탈리아 북부의 여름을 배경으로, 소년 엘리오와 아버지의 연구 조수 올리버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지 두 인물 간의 감정 교류가 아니다. 그것은 성장, 정체성, 이별, 그리고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첫사랑의 통과의례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사랑은 언어보다 먼저 다가오는 감각”이라는 것을 말한다. 햇살 아래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 나무 그늘에서의 침묵, 피치 한입에 맺히는 감정의 파편… 그의 카메라는 그 모든 ‘감각’을 품는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인물보다 공간을 먼저 느낀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감정이 형성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배경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감정을 증폭시키는 하나의 인격체처럼 작용한다. 제작 비하인드에 따르면, 그는 배우들에게 대사보다는 ‘그 공간에 몸을 두는 법’을 먼저 익히게 했다. 촬영은 대부분 자연광을 이용했고, 다큐멘터리처럼 유려한 카메라 워킹을 통해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이는 영화 전체에 걸쳐 유려하고도 살아있는 정서를 부여한다.

파괴와 열망: ‘비거 스플래쉬’와 ‘서스페리아’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 ’는 단순한 휴양지 로맨스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욕망, 질투, 그리고 파괴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록 스타 마리안과 그녀의 연인, 그리고 뜻밖의 방문자들이 얽히며 폭발해 가는 감정은, 루카 구아다니노 특유의 ‘감각적 긴장감’을 완성한다. 이 영화에서의 공간은 다시 한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의 섬 판텔레리아는 아름답지만 고립된 장소이며, 그 고립은 결국 감정의 극단을 이끌어낸다. 한편, ‘서스페리아(Suspiria) ’는 그의 영화 세계 중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지점이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동명 고전 공포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초자연적 요소와 무용, 정치적 비유가 뒤섞인 복합적인 영화다. 그는 기존의 스타일을 벗어나 고어적 이미지, 심리적 불안, 역사적 맥락을 결합해 자신만의 ‘공포 미학’을 완성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서스페리아’는 공포 영화가 아니라, 상실과 재탄생에 대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여성의 몸, 예술, 권력 구조, 그리고 기억에 대한 탐색이 얽힌 이 작품은, 루카 구아다니노가 장르를 넘어선 서사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준다.

식인과 사랑: ‘본즈 앤 올’

‘본즈 앤 올(Bones and All)’은 그가 선보인 작품 중 가장 대담한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식인을 소재로 한 로드무비라는 전혀 새로운 조합 속에서, 그는 또 다시 사랑과 외로움, 경계인의 정체성을 말한다. 주인공 매런과 리는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며, 그들이 떠도는 여정은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에 가깝다.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에서 공포적 요소를 통해 정체성과 본능, 사회적 부적응의 문제를 시적으로 풀어낸다. 인터뷰에서 그는 “식인이라는 극단적 설정은 오히려 인간의 고립감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극대화하는 장치였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본즈 앤 올’은 피와 살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가장 인간적인 외로움과 연대를 그린 이야기다. 촬영은 미국 중서부의 낡은 도로와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인물들의 정서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구아다니노는 다시 한번 공간을 인물의 내면처럼 활용하고, 배우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임무는 그들이 진짜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말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는 시와 같다. 이야기보다는 감정이 먼저 흐르고, 플롯보다는 분위기가 먼저 남는다. 그의 작품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시각으로 이야기하며, 사랑과 상실, 욕망과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아름답고도 아프게 그려낸다. 그는 장르를 넘나들되, 언제나 ‘인간’을 중심에 둔다. 앞으로 루카 구아다니노가 어떤 감각의 이야기로 우리를 다시 한번 흔들어 놓을지,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